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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원(시인) / 크리스마스이브의 백석



남편을 잃은 여자와 아내를 버린 남자가 커피 볶는 집에서 백석을 읽는다

소나무부부가 손을 꼬옥 잡고 드센 바람도 좋아라 유리창 밖에서 응앙응앙 울고

가는 눈이 간간이 뿌려지는 전봇대에 앉아 갓 볶은 커피 향을 기웃거리는 직박구리 한 마리

강 건너 저편엔 천국행 열차가 산그림자를 끌어내려 굼벵이처럼 지나가고

서서히 지워지는 마을들

하나 둘씩 불이 켜지는 만주벌판의 집들

여자는 말없이 백석과 동침하려 이불을 펴고 마침내 도착한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연신 스마트폰에 담아내는 남자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세상한테 지는 길이라네 내가 좋아서 버리는 거라네

눈도 푹푹 나리지 않는데 도무지 일어설 생각을 않는다



§ 종종 신문지상이나 문예지상에 ‘시인들이 좋아하는 시인’이 발표되고는 한다. 그때마다 첫째 혹은 둘째 자리에 백석이라는 이름이 올라온다. 나도 백석 시를 무척 사랑한다. 구수한 평안도 사투리, 청춘의 열망과 좌절, 깊은 감수성과 타고난 낭만이 일제강점기라는 불우한 시대를 만나 그의 시를 꽃피웠다. 뛰어난 작품성에 비해 백석이라는 시인이 덜 알려진 것은 그가 월북시인인 탓이다. 1980년대 후반 정지용, 이용악, 임화 등과 함께 해금이 된 백석의 작품은 인제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백석은 그의 시뿐만 아니라 외양과 연애담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당대의 모던보이이자 로맨티스트였다. 탐스러운 곱슬머리와 시원한 이목구비는 잘생긴 영화배우와 견줄 만하다. 백석은 평생 몇 명의 여인을 사랑했지만, 그중에서도 김영한과의 일화는 애틋하다. 백석은 함흥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때 기생이었던 김영한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함께 살려는 아들을 두고 보지 못했다. 백석은 만주로 도망치기로 결심하고 김영한을 설득했지만, 김영한은 약속을 저버리고 만다. 자신이 백석의 앞날에 걸림돌이 되는 것과 부모에 대한 불효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백석은 북으로 가고 김영한은 여기 남는다. 김영한은 한정식집을 차려 생계를 꾸리는데 이것이 후에 대한민국 3대 요정 중 하나인 대원각이 된다. 대원각은 1990년대 당시 1000억 이상을 호가했다고 한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감명 받은 김영한은 대원각을 시주하려고 했으나 너무나 큰 금액이었기에 스님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0여 년간의 간곡한 부탁 끝에 마침내 법정 스님의 허락을 받고, 1997년 한국 최고의 요정이었던 대원각은 성북동의 길상사라는 사찰로 거듭난다.


대원각이 길상사가 되던 날 김영한은 수천의 대중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만….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김영한은 죽음이 임박하자 남은 돈을 ‘백석문학상’ 제정 기금으로 내놓기도 한다. 어느 날 김영한을 찾아온 기자가 1000억을 시주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김영한은 이렇게 대답한다. “1000억이 그 사람 시(詩) 한 줄만도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가장 널리 알려진 백석의 작품이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 작품은 홀로 만주로 떠난 백석이 김영한을 그리워하며 쓴 시라고 한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백석」의 ‘여자’와 ‘남자’는 ‘커피 볶는 집’에서 이 시를 읽고 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백석」의 창밖 경치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눈 내리는 풍경을 현대적으로 재창작한 것이다. 종종 배경지식이 필요한 작품이 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백석」도 그렇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거기 얽힌 사연을 알고 읽으면 시가 더욱 깊이 다가온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꼭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라는 첫 연만으로도 이미 절창이다.


[사진은 백석 시인과 길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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