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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시인) / 심야의 커피


1.

이슥토록 글을 / 썼다 / 새벽 세  / 시장기가 든다 / 연필을 깎아 낸 마른 향나무 / 고독한 향기, / 불을 끄니 / 아아 / 높이 과일 같은 달.

2.

겨우 끝맺음. / 넘버를 매긴다. / 마흔다섯 장의 / 散文(흩날리는 글발) / 이천 원에 이백 원이 부족한 / 초췌한 나의 분신들. / 아내는 앓고…… / 지쳐 쓰러진 萬年筆의 / 너무나 엄숙한 / 臥身.

3.

사륵사륵 / 설탕이 녹는다. / 그 정결한 投身 / 그 고독한 溶解 / 아아 / 深夜의 커피 / 暗褐色 深淵을 / 혼자 / 마신다.




§ 시를 읽으며 이백 자 원고지 마흔다섯 장이 얼마나 되는지 따져보았다. A4용지로 다섯 쪽 남짓 되는 분량이다. 단어 하나하나를 고르고 골라 쓰는 시인의 성격을 생각하면 모르긴 몰라도 한나절은 족히 책상 앞을 지켰을 테다.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글을 쓰던 시인은 깎은 연필의 향을 맡으며 시장기를 느낀다[“새벽 세 (시) / 시장기가 든다”].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이 (청)과일로 보인다. 겨우 글쓰기를 마친 시인에게 남은 것은 마흔다섯 장의 산문. 시인은  散文(산문)이라는 한자를 사전적 의미대로 풀어 이를 “흩날리는 글발”이라고 표현한다. 혼신을 쏟은 원고는 작가의 자식이나 마찬가지. 그 “초췌한 나의 분신들”의 가치는 “이천 원에 이백 원이 부족한” 금액이다. 이 시가 창작된 시기를 고려하더라도 참 박하기 짝이 없다. 박목월 시인(1916~1978)의 아들인 박동규 문학평론가의 말에 따르면 시인은 밤이면 밥상을 책상 삼아 원고지를 펼쳐놓고 꼭 연필을 깎아 시를 썼다고 한다. “연필을 깎으면 마음을 가다듬게 된다.”라고 했다. 연필로 초고를 마친 시인은 만년필로 원고를 다시 정서했을 테다. 마흔다섯 장 산문의 고쳐 쓰기를 마친 심야의 정경을 두고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아내는 앓고…… / 지쳐 쓰러진 萬年筆(만년필)의 / 너무나 엄숙한 / 臥身(와신).” 원고료가 아니었던들 생활고와 아픈 아내를 지탱하는 일은 더욱 힘에 부쳤을 것이다. 제 일을 마치고 책상 위에 누워 있는 만년필이 엄숙한 건 그래서다. 마감을 끝마친 시인은 앓는 아내를 깨울 수도 없어 커피 한 잔으로 시장기를 달랜다. 시인은 “사륵사륵” 녹는 설탕에서 자기 모습을 본다. 온전한 한 잔의 커피 맛을 위해 스스로를 지우는 설탕은 꼭 가장의 모습을 닮았다. 정결한 투신, 고독한 용해. 시인은 커피, 그 암갈색 심연을 혼자 마신다. 희생과 고독의 달콤함과 쓴맛이 빈속을 적신다.


[사진은 박목월(오른쪽), 박동규(왼쪽)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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