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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시인) / 차신이 필 때



비 오는 날의
눈동자는 너무 무거워
장마를 따라 한없이 떠내려가는
찻잔 속의 외로움,
누가 나의 찻잔 속에 들어앉아
저토록 질질 끌리는 독가스 같은
음악을 켜고 있나?

한 잔의 커피…… 열 잔의, 스무 잔의, 삼천 잔의 커피로……
촉루처럼 반짝이는 순결한 흰 뼈에 드디어 지옥 같은 카페인이 질 때까지…… 끈질기게 마셔보는 고요한 광기의 물…… 친구도 없이

하나의 섬, 아니 혼자인 인간, 그리고 여러 개의 찻잔, 스무 개의, 삼천 개의 빈 찻잔들…… 그만큼의 섬들, 혹은 사람들, 만일 아직도 외로움이 있거든 네 외로움의 손발을 잘라버려라…… 아니 아직도 그리움이 남았거든 네 그리움의 골통을 부셔버리고 그 골통의 잔해를 찻잔 삼아 마지막 한 잔의 차를 마셔 보거라……

비 오는 날의
눈동자는 너무 무거워
장마를 따라 한없이 고여가는
찻잔 속의 그리움,
누가 나의 찻잔 속에
머리를 풀고 외치며 누워 있나?

누구…… 나의 찻물 끓이는 풍로 속에다……
고요히 제 머리를
처박고 쓰러지고 있나……



§ 이 시를 읽으며 한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멜랑콜리.’ 종종 이유 없이 울적한 날 이렇게 말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기분이 좀 멜랑콜리하네.” 흔히 우울감과 동의어로 사용하는 이 말의 역사는 기원전 4세기경 고대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의사가 될 때 하는 선서로 잘 알려진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기원전460~377)’는 의학의 아버지 혹은 의성이라고 불리는 고대그리스의 의사입니다. 그는 사람의 몸속에 흐르는 체액을 혈액, 담즙, 점액, 흑담즙 네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이를 4체액설이라고 합니다. 이중 멜랑(melan, 검다)과 콜레(cholē, 담즙)가 합쳐진 멜랑콜리가 바로 흑담즙입니다. 히포크라테스는 우리나라의 이제마가 사람의 체질을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 넷으로 구분했듯이 네 가지 체액이 많고 적음에 따라 사람의 기질을 구별했습니다. 그는 우울한 성향의 원인을 흑담즙의 과잉에서 찾았습니다.


「차신이 필 때」의 화자는 극심한 멜랑콜리에 빠져 있는 듯합니다.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는 장마철의 어느 날, 화자는 오로지 커피 잔만을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우울감이 어찌나 심한지 그의 귀에는 음악마저 방 안에 서서히 차오르는 독가스같이 느껴집니다. 이 멜랑콜리를 견디기 위해 그는 마냥 커피를 마십니다. 한 잔, 열 잔, 스무 잔…… 흰 뼈가 카페인색으로 물들 정도로 하릴없이 커피를 마시지만, 카페인의 여러 좋은 효능도 그의 우울함을 달래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커피는 상념을 또렷하게 하며, 빈 커피 잔은 멜랑콜리를 더할 뿐입니다. 이 끝 간 데 없는 멜랑콜리의 이유는 외로움과 그리움입니다. 혼자 있다는 것, 그리하여 누군가가 그립다는 심사가 화자에게는 지옥 속에 들어앉은 것처럼 견디기 힘듭니다. 머리통을 부셔서라도 그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쉽지 않습니다. “삼천 개의 빈 찻잔들…… 그만큼의 섬들, 혹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말하듯 이는 화자만의 독특한 정서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감정입니다.


적적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카페에 홀로 앉아 커피를 마실 때, 우리는 하나의 커피 잔이라는 섬에 갇힌 하나의 고독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그런 고독이 열 잔, 스무 잔, 삼천 잔쯤 있습니다. 이때 커피는 터질 것 같은 고독, 그 고요한 광기를 잠시 다스려주는 물일 것입니다. 김승희 시인은 혼자 커피를 마시는 지독한 외로움과 그리움의 시간을 ‘차신이 필 때’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이루어주지는 않지만 잠시나마 우리의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커피. 누군가에게는 이 ‘차신’이 독실한 신앙일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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