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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물 / 이병률

  칼갈이 부부가 나타났다 남자가 한번, 여자가 한번 칼 갈라고 외치는 소리는 두어 번쯤 간절히 기다렸던 소리 칼갈이 부부를 불러 애써 갈 일도 없는 칼 하나를 내미는데 사내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이 들어서기엔 좁은 욕실 바닥에 나란히 앉아 칼을 갈다 멈추는 남편 손께로 물을 끼얹어주며 행여 손이라도 베일세라 시선을 떼지 않는 여인

  서걱서걱 칼 가는 소리가 커피를 끓인다 칼을 갈고 나오는 부부에게 망설이던 커피를 권하자 아내가 하는 소리 이 사람은 검은 물이라고 안 먹어요 그 소리에 커피를 물리고 꿀물을 내놓으니 이 사람 검은색밖에 몰라 그런다며,

  태어나​ 한번도 다른 색깔을 본 적 없어 지긋지긋해한다며 남편 손에 꿀물을 쥐여준다 한번도 검다고 생각한 적 없는 그것은 검었다 그들이 돌아가고 사내의 어둠이 갈아놓은 칼에 눈을 맞추다가 눈을 베인다 집 안 가득 떠다니는 지옥들마저 베어낼 것만 같다 불을 켜지 않았다 칼갈이 부부가 집에 다녀갔다​

  ; 한 편의 콩트처럼 이야기가 분명한데도 처음 시를 일별했을 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시의 화자는 “칼 갈라고 외치는 소리”를 “간절히 기다렸던 소리”라고 말합니다. 저는 으레 화자가 날이 많이 무뎌진 칼을 여럿 갖고 있을 거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화자가 칼갈이 부부에게 내민 것은 “애써 갈 일도 없는 칼 하나”였습니다. 고작 그런 칼 하나 때문에 칼 갈라고 외치는 소리를 “두어 번쯤 간절히” 기다렸다니 잘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화자는 낯선 칼갈이 부부를 굳이 집에 들여 커피까지 대접합니다.

  나름의 답을 찾은 것은 4연의 “집 안 가득 떠다니는 지옥들”이란 구절에서였습니다. 화자가 왜 집 안을 지옥같이 느끼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두 사람이 들어서기엔 좁은 욕실”이 있는 집에 살고, 어머니도 아내도 아닌 화자 자신이 직접 칼갈이 부부를 불렀다는 데서 화자의 곤궁하고 외로운 형편을 추측해 봤습니다. 또 한겨울이면 창문 너머로 들려오던 찹쌀떡, 메밀묵 장수의 소리와 마찬가지로 이제는 거의 사라진 칼갈이의 소리를 간절히 기다리고, 그들에게 커피와 꿀물을 정성껏 내어놓는 데서 화자의 인간적 고독을 짐작해 봤습니다.

  내게 좋은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이 타인에게도 그런 것은 아닙니다. 화자가 칼갈이 부부를 부른 것은 자신의 그런 처지를 잠시나마 달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요. 인간적 고독에서 비롯했음직한 호의 역시 그렇습니다. 화자가 칼갈이 부부에게 건넨 커피는 선의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내에게 그 커피는 ‘지긋지긋한 검은 물’일 따름입니다. 나와 타인 사이의 괴리를 인지한 이 순간을 화자는 “한번도 검다고 생각한 적 없는 그것은 검었다”라고 표현합니다. 2연이 그리고 있는 부부의 살뜰한 모습에 비춰보면 타인에 대한 이해를 수반하지 않은 나의 선의는 반쪽짜리에 불과합니다. 마지막 연에서 “사내의 어둠이 갈아놓은 칼에 눈을 맞추다가 눈을 베인” 화자는 이제 자신도 눈이 멀어버림으로써 진정 사내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불을 켜지 않았다”라는 구절 역시 자신의 세계를 사내의 세계로 치환하여 자기 자신 칼갈이 사내가 되어보려는 화자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타인의 방식을 용납하지 못할 때 우리는 지옥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칼을 간다.”라는 우리말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독한 마음을 먹다.” 또는 “싸움 따위를 준비한다.”라는 의미의 관용구입니다. 어쩌면 이 시의 칼갈이 부부가 가는 칼도 그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 칼끝이 향하는 곳은 타인을 지옥으로 만드는, 검은 물과 같은 우리 마음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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