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로스팅 커피에쓰다

전체상품목록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현재 위치

  1. 게시판
  2. 커피에 쓰다
게시판 상세

신철규(시인) / 유빙




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눈물 속에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고

눈물 한 방울이 그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시계 방향으로,

나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커피잔을 젓는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마지막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다

점점,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갔다

입김과 눈물로 만든


유리창 너머에서 한 쌍의 연인이 서로에게 눈가루를 뿌리고 눈을 뭉쳐 던진다

양팔을 펴고 눈밭을 달린다


꽃다발 같은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백사장에 눈이 내린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하얀 모래알

우리는 나선을 그리며 비상한다


공중에 펄럭이는 돛

새하얀 커튼

해변의 물거품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시계 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 한 연인이 카페에 앉아 있다. 이들은 마주하고 있지만, 마주보고 있지는 않다. 고개를 숙인 채 애꿎은 커피만을 휘젓고 있다. 같은 미래를 꿈꾸던 시간을 뒤로하고 이제 이 둘은 각자의 길로 가려고 한다. 나도 당신도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것을 알고 있으나 누구도 먼저 이별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못한다. ‘우리’에서 ‘나와 당신’으로 나누어져야 할 순간에 상념은 자꾸만 시계를 거꾸로 돌린다. 추억, 후회, 미련, 아쉬움 따위가 둘 사이를 파고든다.


창밖에는 한때의 나와 당신처럼 행복해 보이는 한 쌍의 연인이 있다. 우리의 것이었으나 이제는 우리의 손을 떠나려는 것들. 나도 당신도 “시계탑에 총을 쏘고 /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시간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코 “우리는 /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너무나 자명한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어째서 이렇게 힘들까. “입김과 눈물”, 그 애증에 의해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버린 우리는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마지막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까.


신철규 시인의 「유빙」은 헤어짐을 앞둔 연인의 모습을 그린다. 시에서 시계 방향으로 또 시계 반대 방향으로 휘도는 커피는 간단없이 유예되는 이별의 순간을 형상화한다. 이 이미지는 ‘유빙’이라는 제목과도 절묘하게 겹친다. 사랑에 눈이 먼 연인은 곧잘 자신들의 사랑이 수백 수천 년 동안 쌓인 눈이 단단한 얼음덩어리로 변한 빙하처럼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시간은 영원불변할 것만 같은 빙하마저 녹여버린다. 갈라진 빙하는 각기 유빙(流氷)이 되어 망망대해를 떠돌게 될 테다.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우리’에게도 원래의 ‘나와 당신’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온다.


「유빙」은 신철규 시인의 신춘문예 등단작이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헤어진 연인 혹은 헤어짐을 앞둔 연인의 물이 넘칠 듯 말 듯한 감정들이 복잡하게 얽힌 상태”, “오늘 잘 만나다 내일이라도 헤어질 수 있는 관계의 아슬아슬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눈가루를 뿌리며 노는 연인, 눈 내리는 백사장 풍경, 새하얀 커튼과 해변의 물거품 등의 이미지 연출이 영화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이 시에는 신철규 시인이 좋아하는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고 한다.



[이미지는 영화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2004)의 스틸컷]


#groasting #지로스팅 #커피 #에세이 #커피에쓰다 #커피에달다 #이현호시인 #신철규시인 #유빙 #이터널샤인

관리자게시 게시안함 스팸신고 스팸해제
목록 삭제 수정 답변
댓글 수정

비밀번호 :

수정 취소

/ byte

댓글 입력

댓글달기이름 :비밀번호 : 관리자답변보기

확인

/ byte

왼쪽의 문자를 공백없이 입력하세요.(대소문자구분)

회원에게만 댓글 작성 권한이 있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