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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마시는 시간(L'heure Du The)』 앨버트 린치(Albert Lynch)

『휴일(Holiday)』 제임스 티소(James Tissot)

원두 / 고영민

원두를 넣고 물을 부어
커피를 내린다
기다려 커피 한 잔을 받아와 창가에 앉았다
꽃나무들이 물을 부어
꽃을 내린다
한 철 허공에 필터를 받쳐놓고
꽃차를 우려낸다
몇 차례 뜨거운 비가 꽃가지 사이를 왔다 갔나
올봄 당신은 저 나무에게서
몇 잔의 뜨겁고 진한 꽃차를 얻어 마셨나
어제는 먼지 이는 꽃나무 밑으로
외국인 노동자 몇 명이 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지나갔다
걸으면서 자꾸 자꾸 자꾸
입맞춤을 하던
달콤한 연인이 지나갔다
유치원생들이 줄지어 지나갔다
전동휠체어를 탄 뇌성마비 여자가
얼굴을 묘하게 일그러뜨리며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중년의 여자가 큰 개를 끌며,
끌려가며 지나갔다

  ; 시의 화자는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립니다. 여과지를 올린 드립퍼에 간 원두를 넣고 그 위에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어 커피를 추출하는 핸드드립은 중력을 이용하는 가장 자연적인 커피 추출 방법입니다. “기다려 커피 한 잔을 받아”라는 표현에는 이 커피 추출법이 가진 자연스러움이 배어 있습니다. 화자는 그 커피를 들고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봅니다. 어제를 돌이켜보는 대목에서 이런 화자의 행동이 일상의 한 부분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창밖의 꽃나무를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 한 잔의 여유는 아마 화자가 누리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일 겁니다.

  핸드드립에 필요한 드립퍼는 여과지 받침대로서 물이 잘 흐르도록 홈을 판 깔때기꼴입니다.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있는 꽃나무를 보며 화자는 드립퍼를 연상한 듯싶습니다. 화자의 상상 속에서 나뭇가지는 필터가 되고, 드립퍼의 홈은 나무줄기의 물관이 됩니다. “몇 차례 뜨거운 비”가 드립포트의 물을 대신하고, 꽃나무는 간 원두에서 커피를 내리듯이 꽃에서 꽃차를 우려냅니다. 자연이 만든 이 “뜨겁고 진한 꽃차를 얻어” 마시는 건 꽃나무 밑을 지나는 사람들입니다. 외국인 노동자, 연인, 유치원생, 뇌성마비 여자가 바로 그들입니다.

  “올봄 당신은 저 나무에게서 / 몇 잔의 뜨겁고 진한 꽃차를 얻어 마셨나”. 꽃나무 바리스타가 대접하는 꽃차는 누구나 얻어 마실 수 있습니다. 꽃나무 밑을 지나며 걸음을 늦추기만 하면 됩니다. 꽃차를 마시는 것은 전망 좋은 카페에서 커피의 맛과 향을 음미하듯이 꽃그늘 아래 들어 꽃구경을 하며 꽃향기에 취하는 일입니다. 시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중년의 여자는 꽃차를 얻어 마셨을까요? 요즈음 단풍이 한창입니다. 반려견과의 산책은 물론 소중하지만 잠시 “큰 개”는 맡겨두고 단풍차 한 잔을 얻어 마시러 가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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